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톤 브루크너 (문단 편집) === 극렬 개정 매니아 === 브루크너 만큼 자작곡을 미친듯이 뜯어고친 작곡가도 없다고 일컬어질 정도인데, 실제로 그가 만든 곡들 중 개정을 거치지 않은 곡들이 별로 없을 정도다. 완성된 교향곡의 경우에도 습작 취급받는 00번이나 0번, 중기의 5번과 6번 등을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두세 개의 버전이 있는데, 그것도 엄청난 차이를 보여주는 것들이 많다.[* 그 중에서도 4번은 초판과 개정판이 아예 '''별개의 곡'''으로 취급될 정도로 개정의 폭이 매우 크고,(특히 3악장은 문자 그대로 '''아예 다른 곡으로 교체했으며''' 4악장도 거의 새로 쓴 수준으로 개정되었다) 8번도 만만치 않은 수준의 개정이 이루어졌으며, 3번의 경우에는 다른 번호에서는 보기 힘든 정도의 대규모 삭제 방식의 개정이 여러 차례 이루어졌다.] 이는 근본적으로 자신의 작품의 공연과 출판이 매우 어려웠던 현실에 기인했다. 브루크너는 1868년 빈에 정착하여 본격적인 작곡활동을 시작했으나 브람스와 한슬릭 등 브람스파의 집중 견제로 초연과 출판에서 극심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러한 상황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것이 교향곡 3번이었다. 사실 브루크너는 교향곡 3번 이전에는 그다지 개정을 하지 않았었다. 브루크너는 1873년 교향곡 3번을 완성하고 초연을 위해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교섭에 들어갔으나 가까스로 리허설에 들어갔다. 그러나 최초의 리허설 후 곧바로 연주가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이후 브루크너는 빈 필과 주변의 지적 상황을 반영하여 작품을 개정하여 다시 빈 필과의 연습에 들어갔고 빈 필은 또다시 퇴짜를 놓았다. 그러면 브루크너는 또다시 개작에 들어갔다. 교향곡 3번은 초연하기 전까지 이런 상황을 몇차례나 반복했다. 결국 빈 필과 최초로 리허설을 한지 무려 3년반만인 1877년말에야 가까스로 초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브람스파의 방해 속에 가까스로 진행된 이 초연은 엄청난 대실패를 겪었다. 이후에도 이런 상황이 반복되었다. 초연하기 전에도 지휘자나 악단과 연습이나 시연 혹은 악보만 보여줬을 때 뭔가 비판을 받았다면 즉시 뜯어고칠 태세를 갖췄을 정도다. 브루크너의 소심한 성격으로서는, 크던 작건 자작에 행해지는 비판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브루크너를 위시한 바그네리안들을 인정사정 없이 악평하기로 유명했던 비평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 같은 이들의 날선 혹평도 이런 개정 작업이 계속되는데 일조했지만, 때로는 자신이 신임하고 있던 이들로부터 비판을 받아 개정을 하는 비참한 상황도 있었다. 특히 교향곡 제8번의 경우, 초연을 부탁한 지휘자인 헤르만 레비가 곡에 대해 회의적인 견해를 피력하며 공연을 완곡하게 거절하는 바람에 자살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브람스파의 방해로 출판조차 어려웠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나마 음악계에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제자들의 의견을 대폭 반영하여 수정한 후 출판할 수 있었다. 이렇게 개정을 거친 곡들은 대개 원숙한 모습으로 탈바꿈하기 때문에, 브루크너의 개정 작업은 전체적으로 부정적인 면보다 긍정적인 면이 좀 더 많다고 평가된다. 이 때문에 많은 지휘자들이나 관현악단들이 최종적으로 개정된 악보를 사용해 연주와 녹음을 하고 있다. 특히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교향곡 4번, 8번은 개정작업으로 인해 작품이 크게 개선되었다고 평가받는다.[* 그나마 8번의 초고는 [[재평가]] 여론이 적잖지 않으나, 4번의 초고는 호평을 찾아보기 힘든 것을 넘어 아예 브루크너 교향곡 중 최악의 완성도를 가진 판본이라는 평가까지 받는다. 실제로 아예 완전히 갈아엎은 초고의 스케르초는 개정판의 간결하고 경쾌한 '사냥 스케르초'와 비교하면 너저분하다 싶을 정도로 장황하고 어수선한 분위기이며, 주제만 가져다 쓴 수준인 초고의 4악장은 거의 [[괴작]] 수준으로 조잡하다.] 하지만 이러한 개정작업이 항상 긍정적인 반응을 불러온 것은 아니어서 곡에 따라 판본 간의 평가가 엇갈리는 경우도 있다. 특히 1번의 경우 말년(1891년)에 행한 최종 개정판이 오히려 곡의 개성을 감쇄시켰다는 견해가 있어 최종 개정 이전의 1877년 개정 판본으로 연주하는 경우가 더 많은 편이다.[* 1868년 초연판도 존재하나 1877년 개정판에 비하면 연주 빈도가 매우 미미하다. 애초에 과거에는 1877년 개정판이 1868년 초고인 것처럼 알려졌을 정도다.] 그러나 만년에 개작한 판본의 원숙미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많다.[* 가령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경우 청장년 시절 빈 필하모닉과는 1877년 개정판으로 음반을 남겼지만, 말년에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는 1891년 개정판으로 음반을 남겼다.] 바그너 작품의 악상 인용과 헌정 시도, 초연의 대실패 등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3번의 경우, 판본 문제가 가장 복잡하다. 크게 3가지 판본으로 나눌 수 있는데, 만년에 개작한 1890년판이 많이 연주되고 있지만 그 이전의 1877년판을 선호하는 지휘자도 적지 않다. 여기에 미개정판인 1873년판이 1970년대에 출판된 이후 이 판본에 대한 지지도 크게 늘었다. 3번 교향곡은 개정을 거치면서 관현악법이나 전개가 자연스러워지고 원숙해진 점도 있지만, 청중의 반응을 고려하여 2악장을 수정하는 과정에서 무분별한 삭제가 이루어져 작곡가가 의도한 원래 아이디어와 작품의 아름다움이 크게 훼손되었다고 평가받는다. 교향곡 제9번도 이런 개정 작업에 지나치게 시간을 많이 빼앗기는 바람에 미완성으로 남았다는 견해까지 있을 정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